3. 1의 넋은 자주를 부른다
주체108(2019)년 2월 28일 《우리 민족끼리》
3. 1의 넋은 자주를 부른다
-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연구사와 《우리 민족끼리》편집국 기자가 나눈 문답 -
기자; 최근 겨레의 자주통일열망이 전례없이 높아가고있는 격동적인 환경속에서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3. 1인민봉기가 일어난 때로부터 100년이 되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있다.
이날을 계기로 력사적인 3. 1인민봉기가 민족사에 남긴 거대한 의의와 피의 교훈에 대해 다시금 되새겨보자고 한다.
3. 1인민봉기는 간악한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지폭압통치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항거정신이 불러온 반일항쟁이 아닌가.
연구사; 그렇다. 지난 세기초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무력으로 강점한 일제는 중세기적인 식민지파쑈통치를 실시하면서 우리 민족의 자주권과 존엄을 무참히 짓밟고 삼천리강토를 피바다에 잠그었다.
초대《조선총독》이였던 데라우찌는 《조선사람은 일본의 법률에 복종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죽어야 한다.》라고 떠벌이면서 우리 민족을 무자비하게 탄압할것을 일제교형리들에게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침략자들은 삼천리강토의 이르는 곳마다에 살인폭압기구들을 대대적으로 만들어놓았다. 온 조선땅은 말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감옥으로 전변되였다.
일제는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가두고 고문, 학살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풍부한 자연부원을 마구 략탈하였다. 그야말로 고통과 수난의 시대, 암흑의 시대였다.
일제의 야만적인 《무단통치》하에서 상가집 개만도 못한 수모와 학대를 받으며 살아오던 겨레의 쌓이고쌓인 원한과 분노는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반대하는 반일항쟁으로 폭발하였다.
기자; 전체 조선민족의 강한 자주정신과 불굴의 기개의 반영인 3. 1인민봉기야말로 전민족적인 항쟁이 아닌가.
연구사; 옳은 말이다. 평양에서 일어난 대규모적인 반일시위투쟁을 봉화로 하여 시작된 력사적인 3. 1인민봉기는 삽시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로 노도마냥 번져갔다. 봉기자들은 《조선독립 만세!》, 《일본인과 일본군대는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힘차게 웨치며 일제군경의 총칼탄압에 굴함없이 맞서싸웠다.
봉기가 일어난 때로부터 석달동안에만도 무려 200여만명의 각계각층 인민들이 반일항쟁에 참가하였다. 그해말까지 3 200여회의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고 투쟁의 불길은 전국 각지를 휩쓸었으며 만주와 상해, 연해주, 하와이 등 해외에 있는 동포사회에까지 파급되여 전민족적인 반일애국항쟁으로 확대발전하였다.
기자; 정말이지 우리 겨레는 3. 1인민봉기를 통하여 조선사람은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는 자주정신이 강한 민족이며 나라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기개와 열렬한 애국정신을 지닌 민족이라는것을 온 세상에 힘있게 과시하였다.
연구사; 그렇다. 바로 거기에 3. 1인민봉기가 가지는 력사적의의가 있다.
기자; 3. 1인민봉기에 대한 잔악무도한 일제의 탄압만행도 우리 민족의 반일정신, 자주정신만은 절대로 꺾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연구사; 옳다. 당시 저들의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밑뿌리채 뒤흔드는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반일애국항쟁에 당황망조한 일제는 자기의 강토, 민족의 자주권, 인간의 존엄을 되찾으려는 애국적인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무력진압으로 대답해나섰다.
봉기가 시작된 첫날에 벌써 평양과 서울에서 수많은 헌병, 경찰들을 긴급출동시켰으며 완전무장한 수비대병력까지 인민봉기탄압에 내몰았고 가는 곳마다에서 피비린내 나는 살륙만행을 거리낌없이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그 무엇으로써도 우리 민족의 반일정신, 자주정신을 꺾을수 없었다.
일제의 총칼에 찔려 수십곳에 부상을 입고 숨지는 순간에 나어린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내 가슴속에서 끓는 피의 방울방울이 불꽃이 되여 왜놈의 섬나라를 태워버리겠다는 말을 남긴 사실만으로도 우리 겨레의 반일정신, 민족자주정신이 얼마나 강하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기자; 3. 1인민봉기는 력사적의의뿐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반침략투쟁사에 지울수 없는 심각한 교훈도 남기지 않았는가.
연구사; 그렇다. 인민봉기가 남긴 심각한 교훈은 인민대중이 민족의 자주권실현과 나라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자면 반드시
당시 3. 1인민봉기를 지도한 상층인물들은 민족의 앙양된 투쟁기세에 맞지 않게 처음부터 운동의 성격을 비폭력적인것으로 규정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조선민족의 독립의지를 내외에 천명하는것으로 그치고말았다. 특히 그들은 그 무슨 《민족자결론》이라는것이 세상에 나오자 외세에 의해 빠리강화회의에서 조선의 독립이 결정될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환상을 가지고 구차스런 청원과 외세의존의 방법으로 《독립》을 얻으려고 어리석게 시도하였다.
결국 3. 1인민봉기는 《청원》과 외세의존에 물젖은 상층인물들의 잘못된 지도로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쓰디쓴 실패의 교훈만 남기였다.
기자; 그때로부터 강산도 수없이 변하여 봉기가 일어난지 100년이 되여오고있지만 3. 1의 애국의 넋은 오늘도 살아서 우리 겨레에게 자주만이 살길이라는것을 똑똑히 보여주고있다.
온 겨레는 민족자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외세의 지배와 간섭을 끝장내며 전민족적범위에서 민족의 자주권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을 더욱 힘차게 벌려나가야 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