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운 삶과 사람다운 삶
*. 사람은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해야 사람
史覽 사람이란
역사 史 사 + 볼 覽 람
어제를 보는 즉 기억하는 동물을 가리킨다.
어제를 기억하지 못하면 사람으로 간주되기 어렵다.
사람人인
사람이 팔을 뻗고 있는 모습이라 옥편은 설명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고 사는 모습을 그린 것에 더 가깝다.
불안정한 한사람 ノ + 불안정한 한사람 ヽ
불안정해 보이는 두사람이 모여
陽 양과 陰 음이 모여 안정되어 보이는 人 사람이 된다.
틈 間 간
'사람 人 인' 에 더해 人間 인간 이란 단어가 나온 것은
서로 의지해야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틈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그린 것이다.
한시라도 떨어져선 살 수 없을 것 같은 연인사이에도
異見 이견이 있고 다툼이 있다.
인공지능 로봍이 만들어지는 현대에 적용해보면
사전에 프로그램된 대로만 행동해서 예측이 가능한 로봍이 아닌
사람은 모두가 다를 수 있는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함을 그린 것이다.
혼자라면
'틈' 즉 '이견' 이란 것이 있을 수가 없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임을 인정하며
어제를 거울삼아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인간임을
'史覽 사람, 사람 人 인, 人間 인간' 이 잘 보여주고 있다.
틈 間 간
문 門 문 + 해 日 일
로 문틈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는 것을 그린 것으로
본자는 閒
문 門 문 + 달 月 월로 문틈 사이로 달빛이 들어오는 것을 그린 것으로
후에 閒이 한가하다의 뜻으로도 쓰이면서
間 으로 틈을 나타내게 되었다고 한다.
해서
인간다운 삶이란
왕따당하지 않고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사는 삶을
사람다운 삶이란
어제를 거울삼아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사는 삶
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인간다운 삶이 왕따당하지 않고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사는 삶이란 것을 보여주는데,
'착하다' 를 살펴보면
'착하다'
는 사전적으론
"어른의 말이나 사회 규범·도덕에 어긋남이 없이 옳고 바르다.
일반적으로, 아이들이나 아랫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쓰며,
웃어른에게는 쓰기 어려운 말."
이라고 한다.
여기서
‘붙을 着 착' 자를 살펴보면
*. 도착할 着 착
'양 羊 양 + 눈 目 목'
으로
인간에게 음식과 의복을 주는 동물인 양의 눈을 그려
'착하다' 를 나타낸 것이
'도착할 着 착' 의 원 뜻으로 보인다.
물론 '도착할 着 착' 이
지금은 붙다-도착하다-신을 신다-옷을 입다 를 나타내지만
원래의 뜻인 '인간에게 음식과 의복을 주는 동물인 양의 눈' 에 '하다' 를 붙여
'착하다' 를 나타낸 것이 아닐까 추정해 볼 수 있겠다.
또한 문자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깨끗한 옷을 제대로 갖추어 입고 신을 신고 있는 일가족이 이주해와 (도착하다)
토착민들과 동화하며 함께 살자고 (붙다)
하는 것은
부족의 수가 생산력이며 전투력이었을 때는 좋은 일이었을 것이란 점도
고려될 수 있겠다.
(물론 토착민들보다 많은 수의 이주민이 등장한 경우엔 달리 고려될 수도 있었을 것이긴 하다)
게다가
어른의 말이나 사회 규범·도덕에 어긋나 옳고 바르지 못하면
살붙이-피붙이들과 부족원들과 국가에 붙어살 수 없다.
착하다는 말은
어른의 말이나 사회 규범·도덕에 어긋남이 없이 옳고 바르기에
'살붙이-피붙이들과 부족원들과 국가에 붙어살 수 있다’
는 말로 '붙을 着 착’ 을 써서 ‘着 하다' 로 쓴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해서 인간다운 삶은 왕따당하지 않고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사는 삶이며,
그것이 착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